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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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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등록자 유영희 조회수 406
투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유영희(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
 
 ‘멘탈이 붕괴되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요즘 살 떨리게 체험하고 있다. 좀 더 명확히 애길 풀자면 내가 속해 있는 여성장애인 계층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2013년도에 정부가 여성장애인 교육사업 예산을 흔들 때 국회 본회의에서 그 흔들림을 잡아 주었다. 소수며 약자이기에 권력에 올라서서 직접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우리를 대변하는 힘이 있음에 위안이 되었다.

2014년 정부가 다시 여성장애인관련 사업을 도마에 올리며 수행기관과 당사자들과 정부와의 협의체가 만들어졌을 때도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고맙기만 했다. 그렇다고 불안감마저 떨쳐진 건 아니었다.

2016년 정부 예산안을 전해 듣고는 기가 막혔다. 여성장애인의 생애주기별 고충처리 및 상담과 저학력여성장애인의 기초학습능력 증진을 위해 복지부에서 필요하다고 올린 26억 중, 기획재정부는 14억만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7월부터였다. 전국은 메르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광장에서 몸을 숨기는데, 우리는 광장으로 나섰다. 성명서, 보도자료, 기자회견, 1인 시위……. 몸을 가려줄 그늘 하나 없이 쏘는 듯 내리쬐는 8월의 태양을 온 몸에 고스란히 받으며 그 길에서 내려서질 않았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가을 그리고 겨울을 맞았다. 대설주의보가 내리고 흰 눈이 수북이 쌓인 날, 국회 정문 앞 피켓을 든 1인 시위자의 손은 얼음보다 더 꽁꽁 얼었다. 뻔질나게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녔고, 전국의 모든 지부들은 지역구 의원 사무실 문을 두들겼다. 우리의 예산을 지켜달라고…. 그대들이 말하는 소수약자의 예산, 까무러치도록 많지도 않은 26억을 지켜달라고…. 모두는 손이 발이 되도록 부탁하고 빌었다.

복지부에서도 최하 6억 8백만은 증액해야 한다며 나름 애를 썼다. 다행이 예결소위에서 전주 김성주 의원이 안건을 상정하였고 의결되어 계수조정소위원회에 붙여졌다.

12월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예산의 결과는? 쓰다! 너무 쓰다. 세계 최고 액수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의 1년 연봉 1억3796만1920원보다 조금 높은 1억 5900만원으로 증액이 확정되었다. 111만9661명의 여성장애인을 위한 교육예산은 1년 총 16억에도 못 미친다. 한 사람의 여성장애인을 위한 1년 교육비가 142,900원이다. 한 달 1만2433원이 되는 꼴이다. 복지부 전체 예산 중 여성장애인 관련 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0.0000287%다.

장애계를 향해 공약을 발표하고 뭔가를 말할 때면 의원들 대부분은 소외 약자층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공(空)약’에 불과하다.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행보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이 서면, 소수 약자라고 지칭한 계층을 더 철저히 배제시키는 것이 권력의 속성임을 알았다.

지난 12월 3일 세계장애인의 날을 맞아 치러진 모 단체의 행사에서, 이름만 거론하면 누구나 알만한 한 국회의원이 ‘여러분은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핸디캡을 가졌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날렸다. 개별 인사를 나눌 때 하시는 말씀 또한 가관이다. 소외되지 않으려면 투표를 잘해야 한단다. 국민을 위해 써 달라고 부여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장애를 가진 국민을 향해 경쟁에서 이길 수 없는 핸디캡을 가졌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얼마가 증액되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5개월 동안 그렇게 외치고 요구하고 부르짖던 약자의 목소리에 대한 힘을 가진 자들의 반응이 슬프다. 아니 분노다. 지역구 해당 예산이라면 이런 식으로는 안 되었을 것이다. 30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 중 여성장애인 문제에 대해 심혈을 기울이는 의원이 단 하나 없다는 것이 무던히 서글프다. 힘이나 인맥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 벽 앞에서 절망한다. 여지없이 반복된 차별과 소외의 악순환에 뼛속까지 시리다.

나는 본디 투사형 인간은 절대 아니다. 개인으로서나 한국여장연의 상임대표로서 목적 달성만큼이나 관계를 중요시 한다. 그러기에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이나 반목을 지독히 싫어한다. 투쟁보다는 타협이나 설득이 더 수월하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회색분자와 같은 기질이다. 그런데 태중의 아이까지 합하여 손자가 넷이나 되는 할머니로 살며 나는 투사를 꿈꾼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토록 철저히 까여 보긴 처음이며 분노하고 절망하기도 처음이다.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지독한 통증에 시달리며 누운 체 대소변을 받아내던 시절에도 이런 분노는 없었다. 합병증으로 인해 한 달 뒤의 생명을 보장 할 수 없다던 의사의 선고 앞에서도 그냥 잠잠하였다. 열 두 번의 인공관절 대체 수술을 받으며 관절이 제 기능을 잃어갈 때도 죽어지지 않는 삶에 대한 분노보다는 순응으로 견디었다.

지금 나는,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절망과 분노를 만났다. 생각해보니 2년여 동안, 가는 곳마다 여성장애인의 정책을 세워달라고 외쳤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도 이루어 진 것은 없다. 여성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차별과 무시의 연속인데 한 단체의 수장으로써 투사 기질이 생성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투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시대가 투사를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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