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2
인권과 생활시설 거주인
- 박옥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무총장)
“단체생활을 해야 하니까 누군가의 요구만을 들어줄 수 없지요.”
“바쁘고 힘든 이 와중에 자기주장만 하고 살면 어떡해요? 남들 생각도 해야지.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에요?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것인데, 말도 안되죠”
“같이 사는 처지인데, 자기보다 더 장애가 심한 사람들을 좀 돌봐줘야 하지 않겠어요?”
“자기가 사는 공간인데 자기가 깨끗이 청소하고 치워야죠. 기본 아니에요?”
“자기 먹을거리 생산해내는데 일해야 하는 거 당연하지 않아요? 밭 일 좀 했다고 그게 무슨 문제에요?”
“전동휠체어요? 아휴 그거 위험해서 타면 다쳐요. 여긴 다 언덕이고 경사가 급한데 타고 다니다 사고라도 나면 어떡해요?”
“돌보느라 좀 만졌는데, 그게 성폭력이라면 누가 시설종사자를 하겠어요?”
“말을 안 듣고, 막 소리치고, 아니면 뛰쳐나가는데, 어떻게 해요? 묶어놔야지요.”
“요즘 인권, 인권 하니까, 이용자들의 기가 얼마나 쎄졌는데요? 종사자들이 꿈쩍도 못해요.”
인권침해, 폭력, 성폭력 등이 발생한 시설에 가서 만난 종사자 또는 시설장으로부터 듣는 말입니다. 위의 글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빼앗겨서도 아니되고, 양도해서도 안되는 것이 인권이고, 모든 사람이, 바로 그 인권의 주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나요?
흔히 장애인생활시설이라고 일컫는 수용시설은 명백히 인권침해적 공간입니다. 여러 사람이 동일한 시간에 기상하고, 동일한 시간에 식사하고, 동일한 시간에 잠을 자야 하는 단체생활입니다. 학교, 군대 등 단체생활을 하는 곳에서는 여지없이 개인의 자유가 일정한 제약을 받기 마련입니다. 생활시설, 그 자체로도 그곳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인권이 침해되는 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학교나 군대는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생활시설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부모 등 보호자 동의없이는 탈 시설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형기 없는 감옥’으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심각한 인권침해, 폭력. 성폭력이 없다 하더라도 시설 그 자체가 인권침해적 공간임을 확인하면서도 시설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억일까요?
한국 사회에서 시설은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자리를 잡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고아나 가장을 잃은 부녀자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 곳이죠. 이 때 국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해외선교사들은 학교나 고아원 등 시설들을 만든 후 자신들과 함께 일한 한국 사람들에게 운영권을 넘기고 자국으로 떠났습니다. 이를 물려받은 사라들이 바로 시설 1세대 운영자들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국가 지원 없는 민간의 빈약한 물질적 기반을 토대로 운영하다보니 ‘사랑과 봉사’란 가치가 강조되었습니다. 서로 돕고 나눈다는 것은 예나지금이나 참 소중하고 아름다운, 결코 잊어서는 안될 가치입니다.
하지만 점차 이 가치가 본래 의미를 잃고 퇴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관련 법률이 만들어지는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가의 지원이 시작됐고, 도움이 손길을 후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돈은 이용자에게 사용되기 보대는 시설을 확충하고, 같은 법인의 다른 시설들을 만들어나갔으며, 계열사를 여럿 둔 그룹회사처럼 비대해지는 모습으로 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시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서비스의 질적 개선이 이뤄지기 보다는, 시설의 규모가 커지고 운영이 방대해지면서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 집중되었으니까요. 규모의 적정성 문제는 중요합니다. 운영의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관리’에 치중해 왔지만 사람은 주체적인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이지 관리 당해야하는 대상이 아니니까요. ‘인권’을 이야기한다면, 장애가 있고 가난하다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는 문제지요.
이런 관습과 사회적 용인은 이용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직원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해왔고, 결국 제반 환경의 열걍함은 또 다시 직원들에게 사랑과 봉사. 희생정신을 강조하게 되는. 악순환의 구조를 갖게 된 것이지요. 물론 모든 시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들어서는 규모를 줄이고 물리적 환견을 개선하고 시스템을 민주적으로 바꿔나가는 약간의 실험적이고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시설들도 많지요. 여기서 언급한 시설의 운영 구조는 역사성을 살펴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여전히 이걸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시설들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천의 해바라기 시설에서 의문의 죽음이 발생하고, 대구 청암재단에 있는 수십 명의 생활인이 죽었음에도 그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며, 폭력, 성폭력, 인권침해 등의 상황이 해맏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언제나처럼 뒷짐 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인권침해, 폭력. 성폭력이 없다하더라도 시설 그 자체가 온전히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당하는 공간임을 알고 있다면. 한시라도 ‘탈 시설 자립생활’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그에 따른 정책을 마련해야 할 복지부는 끊임없이 시설조사만 합니다. 시설 내 인권침해 조사.
영화와 단행본을 통해 사회적으로 이미 알려진 도가니 사건이 터졌을 때도 복지부는 시설 내 인권침해 조사를 하겠다고 밝혔고. 해바라기도 마찬가지고. 인간원 사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 생활시설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조사하는데 에너지를 쏟는 정부의 모습에서 아연실색할 뿐입니다.
‘탈 시설 자립생활’ 패러다임의 가장 큰 난제는 시설이 꼭 존재해야 하는 사유를 자긴 정부, 시설 운영자, 부모 등 가족, 그리고 시민의 ‘침묵의 카르텔’일 것입니다. 가족이 책임질 수 없다는 이유로 갈 곳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시설 운영자, 그리고 그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정부, 마지막으로 이런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하는 시민, 수용시설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지 않으려고, 또는 보여도 보지 않은 듯, 입을 다물고 있는 침묵의 카르텔에 의해 생활시설을 존재하고 있습니다. 탈 시설 자립생활은 이미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이를 향한 정부늬 정책 의지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인권침해, 폭력, 성폭력이 일어난 법인 시설 하나를 대상으로 적게는 3-4년씩, 길게는 10여년씩 싸우는 이런 투쟁보다 나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시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인권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탈 시설 자립생활’이라는 멀고도 험난한 그 여정에 함께 해요.
※ 시설내 인권침해 유형
인권침해유형 세부내용
신체 자유 침해 - 불법 구금, 외출 금지, 적절한 보장구 미지급, 폭행, 성폭행, 동의 없는 불임시술, 강제 삭발, 강제 투약 등
통신 자유 침해 - 외부와의 편지, 전화, 면회 검열과 제한, 핸드폰 소지 제한
종교 자유 침해 - 종교 강요, 종교 제한, 종교 집회 강제 동원, 강제 안수금식 시도
사생활자유침해 - 도청, 감시카메라, 강제 결혼, 개인 소지품 제한
생존권의 침해 - 열악한 의식주, 의료서비스의 부재, 징벌목적으로 음식물 제공 제 한 또는 금지, 살인, 암매장
재산권 침해 - 수급액, 장애수당, 장례비 등 갈취, 입소금 갈취, 신용도용에 의한 신용불량자로 전락 등
노동권 침해 - 강제노동,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거나 적은 돈을 지불함.
자기결정권침해 - 입ㆍ퇴소 결정권 제한, 일상에서의 자율 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