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잠재적 장애인이다’
광주여성장애인연대 팀장 채 유 리
‘우리 모두 잠재적 장애인이다’
여성폭력 분야 10년이 훨씬 넘은 경력임에도 쑥스럽고 민망하게도 여성장애인 분야는 이제 막 1년 6개월. 신입이라는 단어가 무색하지만, 광주여성장애인연대에 발을 디디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높다고 스스로 자부하였다.
광주여성장애인연대 입사 전 광주여성장애인연대(이하 광여장)에 대한 히스토리를 찾아보았다. 20년 넘은 연혁 안에 18대 국회의원 곽정숙 의원의 사진을 발견하며 반갑고도 놀람을 가졌는데 한여장의 이사이자 광여장 공동대표로 계셨다는 사실이었다. 광여장 역사 안에 독보적이고 위엄 있는 곽정숙 의원의 존재만으로 광여장에 대한 신망과 활동가들의 진보적인 행보를 기대하며 인권도시라 칭하는 광주에 입성하였다.
부설 상담소에서 1년 넘게 근무하는 동안 장애 유형에 대한 특성 등을 공부하며 지원과 연계, 프로그램, 홍보 등의 업무를 진행하였으며 대부분 정신장애 중 발달, 지적장애인을 마주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나의 사례업무 중 내담자에게 교통약자 이동지원(일명 새빛콜)서류 작성 및 발급 등의 지원을 통해 대상이 되어 편하게 새빛콜을 이용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새빛콜이 광주광역시에서 근교 전남으로 이동하는 것은 가능하나 전남지역에서 광주 시내로 이동하는 새빛콜은 이용할 수 없다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고 상담소장에게 전달 한 바 있다. 이후 전남의 유관기관과 논의가 오갔으며 현재 조례가 통과되어 이후 절차를 밟는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을 위한 교통수단이 원활하지 못한 구조적인 문제가 여실히 드러난다고 생각되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에서 목숨 걸고 외치는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지하철 탑승 시위의 언론 보도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다치지 않아야 할 텐데, 충돌 없이 시위가 마무리되어야 할 텐데…. 라며.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될 부분이 있다. 약자가 약자를 향한 슬픈 현실의 외침이다. 지하철 탑승은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 이용하며 일명, 가진 자들은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하기에 지하철 시위의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그럼에도 전장연이 지하철에서 목소리를 내고 단체행동을 하는 것은 버스나, 기차, 도로 한복판에서의 외침보다 사람들 무리 속에서의 간절함을 절절히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닐까 한다.
지금은 부설 장애인자립지원공동생활시설 이음에서 인권교육과 학습지원, 프로그램, 거주인 자산 관련 통장관리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장애인들에 대한 지원과 연계가 유관 기관과의 교집합으로 이뤄지는 것은 비장애인 지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미묘한 차이가 감지되었는데 그것은 불평등한 구조와 불편한 시선이었다.
이 부분은 상담소에서 지원 동행 시 느낀 바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배려라는 미명 아래 과잉친절 또는 동정, 그 넘어 배타적인 언행(질문에 대답 무시, 쳐다보지 않는 행동) 등을 경험하게 된다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그저 한숨이 나온다.
물론 과거보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확대되긴 하였으나 아직 사회적 인식은 멀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대다수 동의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잠재적 장애인이다’라는 말을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자연 재난, 교통사고, 환경, 질병 등의 이유로 신체장애, 후유 장애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 또한 20대 후반 원인 모를 이유로 왼쪽 눈이 실명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으며 삼성서울병원에서 흰자 위에 주사를 몇 차례 맞으며 인턴부터 전문의들이 나를 둘러쌓고 회의와 사진 자료를 분석하며 진료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눈이 실명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한쪽 눈으로 어떻게 살지?’라는 참담한 상상도 하였다. 당시 친구가 장애등급을 받으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결단코 싫다며 거부하였고 더욱 치료에 매진하여 1년 반 이후 완치되었다. 그로 인해 내 몸의 소중함을 절절히 알게 되었고 장애인은 가까이 있으며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였다.
광여장의 나눔과 실천의 행보를 응원하며.
끝으로 차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을 공유하고자 한다.
차별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차별받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
차별은 당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만 보인다.
언뜻 보면 평등할 것 같지만
위치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위계가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안 보이기 때문이다.
차별은
위계화된 제도와 구조의 문제이지
‘싸가지’의 문제가 아니다.
“왜 내 눈에는 그 차별이 보이지 않는가?”를 질문할 때
차별을 인식할 필요가 없는 자신의 위치와
늘 차별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의 위치가 보인다.
그 위치가 보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차별의 구조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은 차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차별에 연루되어 있다.
시사인 엄기호 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