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 인권, 의료 등 분야별 여성장애인 차별 사례
<한여장 신문고>
81호의 주제: 각 분야별 여성장애인의 차별 경험 사례를 고발
<한여장 신문고> 코너는 각 지부의 인권저널 기자단이 주제에 맞게 취재한 실제 사례들을 담은 코너입니다. <한여장 신문고>를 통해 여성장애인들이 생활에서 겪은 차별을 고발하고, 여성장애인 당사자 입장에서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며, 더 나아가 실제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
◎ 사례 1(대전지부)
[대전지부 회원 (구○○)]
길을 가다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보면 고등학교 시절 씁쓸했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늘 혼자였다가 고등학교 때에 친구가 생겼다. 내가 그 친구를 만나게 된 계기는 강당에서 조회를 끝내고 교실로 들어가려는 나를 나쁜 아이들이 괴롭히는데 그 친구가 와서 나쁜 아이들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주었고 도와주었다. 그 이후 늘 혼자서 밥 먹던 내가 그 친구와 점심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었고 그 친구 덕분에 그 친구의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그때는 학교에 가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 때 내가 도둑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심지어 영문도 모르는 나에게 달걀도 던지고, 책까지도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는 그 상황이 왜인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저 당하기만 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다시 나는 친구들이 없어지고 혼자가 되었다. 나를 도와주었던 그 친구는 그래도 “내가 아는 너는 그럴 애가 아닌데 너는 아니지?”라고 믿어 주었지만 결국 나를 멀리하였고 다 떠나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한참이 지난 후 그 진범이 잡히고 나서야 도둑 누명을 쓴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언젠가 담임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오라고 해서 간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계시지 않았고, 조금 기다리다 혼자 있기가 불편해 다시 나온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선생님 자리에 모아 놓았던 적십자회비가 없어졌고, 다른 친구들이 교무실에서 나온 나를 보고 내가 그 돈을 가져갔던 것이라고 오해를 했던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으셨고, 자초지종을 설명하지도 않으셨다. 다들 나를 오해한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고, 그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내가 한심하지만…. 나에게 이런 상황과 일들은 비교적 익숙한 일이었고, 제대로 해결된 일이 없었던 터라 굳이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장애인 연대에 와서 교육과 개인 상담을 통해 나에게도 표현할 권리, 내 생각을 말할 권리,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알고 나 자신을 적극 보호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신문고를 통해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
◎ 사례 2(부산지부)
현재 저는 한 단체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담당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단체는 소규모 단체라 자체적으로 교육 장소를 갖추고 있지 않아 교육 장소를 물색하고 대관하는 일도 제 업무입니다. 그런데 모르시는 분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실지 몰라도 교육 장소를 구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교육 장소가 그리 많지 않은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장애인을 위한‘기본적인’편의 시설을 갖춘 곳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교육 장소가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아 교육 장소를 구할 때는 해당 장소가 지하철역 근처에 위치하는지부터 제일 먼저 확인합니다. 장애인 참가자분들이 편하게 오실 수 있도록 접근성을 위해 역세권 위치 여부도 중요하지만, 교육 장소 내 장애인 화장실이 없으면, 여차하면 참가자분들이 지하철역 내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게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구색 갖추기처럼 고층 건물에 그것도 딱 한 층에 겨우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이 있거나 화장실 내 쌓아둔 청소도구나 각종 물품으로 실질적으로 장애인 화장실로 사용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장애인 주차장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용할 수 없게 되어 있거나, 아니면 건물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휠체어 이용자분들이 들고나는 차들을 피해 가며 이동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아찔한 상황이 벌어질 때도 허다합니다.
얼마 전 저희 단체의 휠체어 이용자 회원 한 분은 타 단체의 특강을 듣기 위해 수강 신청을 했다가 포기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강연이 개최되는 장소에 장애인 화장실은커녕 엘리베이터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당 단체에서는 거듭 사과했지만, 회원분은 화도 나고 씁쓸한 기분은 감출 수 없었다며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장소들이 민간에서 운영하는 장소라고 짐작하시겠지만, 전혀 아닙니다. 준정부기관 또는 소위 깨어있다고 하는 시민인권단체들이 운영하는 교육 장소였습니다. 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장애인에게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교육권과 안전권조차 온전히 확보해 주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언제까지 장애인들은 이런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야 할까요?! 장애인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가요?
◎ 사례 3(순천지부 김○○ 기자)
나는 태어날 때 조산기가 있어 산소부족으로 인해 뇌 손상을 입어 뇌 병변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지금은 장애인의 정책에 많은 변화가 있어 여성장애인들이 밖으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지만 40년 전만 해도 나는 온종일 집에만 있어야만 했다.
어느 날 집안에 아무도 없을 때 기어서 대문 밖을 나간 적이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나도 함께 끼어 놀고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 말을 들었다. “웬 거지가 온다. 다른 데로 가자”라는 말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네 아이들이 했던 그 한마디가 마음속에 큰 상처로 남아있다.
◎ 사례 4(충남지부)[의료영역]
휠체어를 이용하는 A씨는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여성전문병원에 방문하였으나 간호사의 태도에 불편함을 감추지 못했다. A씨는 병원에 방문하여 검진 전 문진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간호사에게 장애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고지를 한 후 순조롭게 검진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유방 엑스레이 촬영 과정에서 A씨를 당황케 한 사건이 벌어졌다. 촬영 기기의 높낮이 조절이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이때 간호사는 A씨에게“일어나실 수 없어요? 잠깐도 일어나실 수 없어요? 진짜 일어나실 수 없어요?”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A씨는 간호사의 질문에“일어날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B씨는 본인은 한 달에 1번은 정기검진차 병원에 방문하는데 A씨와 같은 상황이 생길까 봐 두려워 배리어프리가 잘 되어 있다는 서울로 오고 다닌다고 답했다. 전동 휠체어로 지방에서 서울까지 한 달에 1번씩 이동하는 B씨는 체력과 시간 전부를 길에 낭비하는 기분이라고 답했다. 또 병원 예약 일이 다가올수록 벌써 진이 다 빠진다고 덧붙였다. 많은 대학병원이 있음에도 배리어프리가 안 되어 있는 실황에 A씨와 B씨는 한숨을 쉬며 서로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 사례 5(충북지부 이○○ 회원)
안녕하세요.
저는 뇌 병변 여성장애인입니다.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여전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고, 제가 살고 있는 곳에는 장애인이 4명 있었는데 그중에 3명은 남성 장애인이었고, 저 혼자 여성장애인이었습니다.
저는 맏이이고, 여동생 두 명과 남동생 한 명으로 4남매였습니다. 동생들은 학교에 다녔는데 맏이인 저는 여성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동네 남성 장애인들은 모두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졸라서 또래보다 2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반에서 1, 2등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공부로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제가 중학교를 마치던 해, 18살쯤에 이제 중학교를 마쳤으니 선을 보고 결혼을 하라고 하셨지만, 결혼에 대해서 정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기에 저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대학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집에서는 저를 치워버리려고?! 돈 많은 집에 발달장애가 있는 남성을 만나게 하여 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모님의 강권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저는 대학을 다녔지만, 시댁에서는 제가 집 밖으로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때로는 집에 가두는 일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결혼은 감옥이었습니다. 결혼 생활 2년 반 만에 이혼 소송을 시작했고, 이후 3년의 기나긴 재판 끝에 비로소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저를 치워버리려고 하는 집구석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조금씩 모아놓은 비상금으로 집을 얻고 자립을 하여 지금은 여성장애인으로 사회생활을 하며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 사례 6(통영지부 회원 박○○)
수영장(공공시설)을 이용하면서 안전요원에게 샤워장에서 수영장으로 이동시 휠체어를 이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안전요원은 이 수영장은 장애인이 이용하게끔 설계된 게 아니라서 휠체어를 구비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수영장에 장애인을 받으면서(공공시설이면서) 휠체어를 구비하고 있지 않은 게 말이 되는지. 나는 내가 직접 수영장 담당자에게 건의해서 얘기해 보겠다고 하니 본인이 안전요원이며 관리팀장이라고 말하면서 한번 알아보겠다며 오히려 나를 설득했다. 다음 날 관리팀장이 수영연맹과 장애인 체육회에 문의할 결과 휠체어를 갖추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말하며 장애인 체육회를 통해 내년 예산을 확보하여 휠체어를 갖추어 두겠다고 말했다.
공공시설에 휠체어 한 대를 갖추지 않는 것이 지금 현실에 맞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