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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장연 웹진

87호

87호
<여성장애인 차별사례> 나의 배움이야기

<여성장애인 차별사례>

 

나의 배움이야기

 

충북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이선희 회장

 

어린시절부터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5남매의 맏이로 살아왔다.

 

시골마을에서 장애아가 살아가기 녹녹치 않은 현실.

그 시절에 장애인은 골방에 갇혀있거나 시설로 보내야 하는 집안의 수치였다.

나도 동네사람들이 데리고 있지 말고 시설로 보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근데 학교를 보내다니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동생이 네 명이나 있었다.

여성이면서 장애가 있다면 학교 보낼 생각은 엄두도 못 낼 것이다.

 

내가 사회적으로 처음 소외를 느낀 건 8,

같이 놀던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서 엄마에게 물었더니 학교에 갔다고 하는데, 난 학교 갈 수 없다고 하셨다.

장애인이라고 놀림 당하고 공부를 따라가지 못할까 봐 걱정하셨단다.

그때도 난 호기심이 많았던 아이였던 것 같다.

 

친척언니가 달력을 보며 가르쳐주었던 숫자를 기억해서 마당에 낙서하면서 놀던 걸 엄마가 보셨고 서울에서 대학생이 농활로 동네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쳐 주면서 나에게 배움의 길이 열렸다. 마을 떠나며 학교 보내라고 권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어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전학 간 학교에 간 첫날 반배정을 받은 선생이 나를 데리고 인사를 시키고 자리를 정해주고 집으로 갔는데, 그 다음 6반으로 가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고는 10반으로 가라고 했다. 결국 난 3학년을 4번이나 반을 바꾸며 돌아다니게 됐다.

갑자기 전학온 장애인학생을 맡기가 겁이 난 건지, 싫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것이 낯선 환경 속에서 난 대혼란을 겪었다.

지금은 장애인학생을 위한 메뉴얼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전무했고 학교를 다니는 장애학생이 그만큼 드물었다 쳐도 당하는 내 입장에선 너무 힘든 시기였다.

 

그 다음은 그럭저럭 지냈다.

 

6학년때 담임선생님은 특별한 분이셨다.

젊은 남자선생님이셨는데 야구를 너무 좋아하셨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반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하고 여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눠서 베구공으로 야구를 하게 하고 나에게 점수를 적거나 칙이나 아웃을 체크할 수 있는 역할을 주었다. 난 이때 처음으로 체육시간을 함께 즐기면서 지냈고 6학년 마지막 성적으로 를 받았다.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마냥 즐겁고 행복했지만, 지금도 혹시 장애학생이 예체능 과목에 소외 당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장애학생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주어진다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장애이해교육이 의무화가 되었고, 본인도 당사자로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지만 교육을 받는 건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중학교 배정을 받았는데 사립학교라고 하는데 규율이 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는 사춘기와 반항심이 강해서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를 하게 되었다.

온식구가 낙향하면서 엄마가 복학을 알아보고 복학을 하게 된다.

왕따에 구타를 견디며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 난 살기 위해 공부했다.

선생님 한 분이라도 내 편이 되어주면 학교생활이 좀 나아졌으니까......

어릴 때 꿈은 선생님...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참 좋았다.

반친구들이 평소에는 없는 듯이 무시하다가도 어려운 수학문제를 나에게 가져오면 그 사람에 맞춰서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성적은 충분한데도 가고 싶은 학교에는 가지 못하고 시골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그런 꿈들을 서서히 멀어지는 느낌.......

 

부모님이 대학진학은 집안 형편 상 어렵고, 동생들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결혼하라고 했다. 스물 한 살 고교졸업을 앞둔 겨울에 선을 봤다.

전기 후기 입시에는 원서조차 내지 못했다. 부모님 반대로....

이대로 포기하면 아깝다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전문대 원서를 넣었다.

나에게는 마지막 기회였었다.

면접에서 떨어질 줄 알았는데, 합격이었다.

그 곳에서 내 인생의 최대의 전환점을 찾은 느낌이었다. 컴퓨터라는 신문물을 처음 알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흑백이 분명했던 시기.

그래서 난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라는 것에 공부하고 남들보다 많이 알기 위해 노력하는 일... 그런데 자격증 시험에서 필기에서는 붙고 실기에는 떨어지는 악순환의 연속.....

속도가 우선인 세상에서 장애인에게 주어진 냉혹함......

그리고 취업전선에서의 낙오가 나를 점점 암흑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래도 그대로 있을 순 없었다.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알바를 지속하면서 세상의 문을 두드리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취업이 안 되는 이유가 능력이 부족해서인가 싶어 또 공부를 시작했다.

방송대에 편입하여 통계를 공부하고 회계를 공부하고 그래픽을 공부하고.... 공무원시험도 준비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장애인단체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상담소 일을 하면서 전문적으로 일하고 싶어서 사회복지를 사이버로 공부해서 1년 반만에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여러 사건이 우리를 분노하게 했고 함께 싸우고 위로하고 지원하면서 18년을 일하다가 새로운 소장과의 갈등으로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되었다.

그 때는 한동안 멍했다. 그래도 난 가만 있질 못했다.

교육기관을 돌아다니며 영어와 인권교육강사 양성과정을 들으면서 그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그 배움을 바탕으로 충북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회장직을 맡아 활동하고 있고 인권강사, 공공후견인, 장애인인권운동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단체에서 장애인평생학습 사업으로 배움의 기회에서 소외되었던 장애인 당사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사업도 예산이 삭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애유형별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한 부분이 많은데 늘려도 부족할 판에 삭감이라니 어이가 없다.

정부와 지자체, 교육 당국이 좀 더 세밀한 장애인 교육정책이 있어야 장애인이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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