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포커스1>낙태죄 폐지와 재생산권의 보장, 모두를 위한 진보
한국여성단체연합 백미순
지난 3월 12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이하 CEDAW)는 한국정부에 재생산 권리에 관한 정책의 검토, 낙태의 비범죄화와 임신중절 여성에 대한 돌봄 체계 제공 등을 권고한 바 있다. 낙태죄 폐지를 위한 여성들의 투쟁과 낙태죄를 규정하는 형법 제269조, 제270조의 위헌 여부 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심리 등 한국 상황에 기초한 권고였다. 여성의 인권에 관한 국제기준인 여성차별철폐협약에 근거하여 내려진 이 권고 이전에 이미 CEDAW의 제7차 최종 견해(2011),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관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의 일반논평 22호(2016), 유엔의 국가별 정례 인권 검토(2017) 등 재생산 권리 보장을 위한 유엔 차원의 보편적 기준 제시 및 한국정부에 대한 권고가 반복된 바 있다.
유엔의 수차례 권고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권고 수용을 위한 어떠한 노력 없이 형법상의 낙태죄 조항을 유지하고 모자보건법으로 극히 제한적인 사유로만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는 법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6년 9월 보건복지부는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을 위반해 임신중절 수술을 한 경우를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여 적발 시 최대 1년간 의사 자격 정지가 가능하도록 하는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일부 개정령(안)’을 입법 예고했다가 거센 비판여론이 일자 철회하는 퇴행적 행보를 보인 바 있다. CEDAW 권고가 있었던 비슷한 시기인 지난 3월 15일 제37차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한국 정부는, 작년 11월의 3차 국가별 정례 인권 검토(Universal Periodic Review)의 권고 수용여부를 발표하면서 “인공임신중절을 원하는 여성과 해당 의료 서비스 제공자에 대한 처벌 철폐”를 불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낙태죄 폐지 혹은 낙태 허용 사유 확대가 임신한 여성의 생명,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뿐만 아니라 태아의 생명권과도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현재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인 낙태죄의 합헌성에 관한 결정, 해외 각국의 입법례, 그리고 사회 각계의 의견을 모두 고려하여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의 영역에서 국가가 낙태죄의 존치로 인하여 여성들이 겪고 있는 직접적인 고통과 위험을 계속 외면하고 있으며 낙태의 비범죄화에서 나아가서 보다 큰 틀에서 재생산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적극적 노력을 방기하고 있다.
여전히 임신중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 여성은 위험을 감수하며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소위 ‘불법’ 수술을 받거나 온라인상 유통되는 자연유산유도를 위한 탈법 약물을 구입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여성들이 의료사고를 겪거나 심각한 후유증을 겪더라도 적절하게 대처하기 어렵다. 남성 파트너나 배우자의 고발 협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모자보건법」상 허용 사유에 해당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허용사유를 입증할 것을 여성에게 요구하는 병원 측의 책임회피로 임신중절의 문턱은 높다. 비록 적용률이 낮더라도 형법 제269조 낙태죄 조항은 살아 움직여서 여성들의 삶을 전방위적으로 규율하며 위협한다. 여성들은 낙태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낙태죄의 비범죄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한편, 정부는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을 인구 재생산과 관련한 생식·보건의 문제로만 협소하게 다루면서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다. 정부정책이 임신·출산하는 여성 지원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임신·출산·양육에 직면한 다양한 여성들의 삶의 조건과 단계별 세부 요구를 반영한 면밀한 지원 사업은 턱없이 부족하다. 장애여성 역시 여전히 섹슈얼리티, 임신과 출산, 양육 각 단계에서 적절한 보건의료 지원과 돌봄 조력을 충분히 받고 있지 못하다.
이에 대해 CEDAW가 한국 정부의 협약 이행 상황을 심의해 내놓은 3월 12일 최종 견해를 통해 우리 정부에 “건강 관련 법률과 정책들, 특히 여성의 성과 재생산 건강 및 권리에 관한 정책들을 검토하고, 교차적 형태의 차별을 겪는 모든 여성들이 건강 영역에서 실질적 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시정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재생산권 개념은 1994년 카이로 인구개발국제회의,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행동강령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성관계 여부, 시기와 파트너, 임신‧출산 여부와 시기 등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이에 대한 양질의 사회 서비스 및 정보에의 접근권, 건강권 등의 포괄적인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 SRHR)로 정립되어 왔다. 이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각국의 의무가 되었다. 따라서 재생산 권리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인구관리의 도구가 아닌 개인의 기본적 인권으로 인식하는 관점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정부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며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하던 과거부터 초저출산의 위기에 직면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 여기며 ‘모성 보호’ 중심의 국가주의적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작년부터 본격화된 헌법 개정 논의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현행 제36조 제2항 모성보호 조항은 재생산권을 포괄하기에 협소하고 여성을 가정 내의 모성에 국한시키는 차별적인 조문이므로 삭제하고 가족생활 조항과 분리하여 별도 재생산권 조항으로 재구조화할 필요가 있으며, 재생산권 앞에 모든 사람이 성적 주체로서 존엄하다는 원칙을 명시하여 인간의 통합성으로서의 성성(性性, sexuality)이 침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결혼과 출산, 양육, 성적 행위 등에 관한 과거의 획일적, 규범적 기준은 약화되고 있음에도 여성의 성과 재생산에 대한 억압과 낙인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여성은 안전하고 자유로운 성적관계를 맺거나 거부가 어렵고 피임 접근성 역시 낮다. 게다가 임신 중단은 법적 처벌 대상이다. “가족형태 및 경제적 상황, 장애 여부에 따라 임신‧출산의 가능성이 제한되며”, 임신은 물론 “출산 이후의 양육 책임이 여성에게만 과중하게 부과되고 있다.” “임신‧출산의 권리만이 아니라 피임과 임신 중단의 권리, 성적 침해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누구나 주체적으로 성을 누릴 권리 역시 존중”되어야만 성과 재생산의 권리가 실현될 수 있다. 재생산 권리의 존중과 보호, 실현의 관점에서 정부가 정책을 설계하고 실천할 때, 사회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과 동시에 저출산 문제도 해결의 돌파구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낙태죄의 존치로 여성에게 출산 강요를 계속할 때 존속을 고민해야 할 국가 위기 상황은 개선될 수 없다. 최근 35년 만의 국민투표로 임신중단을 합법화한 아일랜드, 14주 이내의 낙태 합법화 법안이 하원을 통과한 아르헨티나까지 임신중단 비범죄화에 대한 세계적 흐름도 강력하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다. #미투 운동,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페이미투와 은행권 성차별 채용비리 규탄, 낙태죄 폐지 등 여성의 삶을 옭아매는 다양한 영역을 드러내고 저항하는 연이은 행동과 여기에 운집하는 여성들은 우리가 익숙했던 남성중심주의 사회질서와 구조, 반쪽짜리 민주주의에 균열을 내고 있다. 여성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에 순응하며 살지 않을 것이며 현실을 변화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국가는 낙태의 죄를 묻는 프레임에서 모든 사람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신속히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조만간 있을 헌법재판소 낙태죄 위헌 심판 결정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 변화는 헌법재판소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며,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는 변화를 위한 전방위적 모색과 대책마련에 나서야 한다.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때까지 여성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