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게 국가의 의미는?
원윤선
(사)한국시각장애인여성연합회 대표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참 기이한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에‘이번엔 나도 한번 핼러윈 축제를 즐겨보리라’하며 가볍게 집을 나섰던 우리 아이들, 우리 젊은이들이, 거리 한복판에서 집단적 비명횡사를 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믿을 수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대참사가 벌어졌지만, 책임을 통감하고 수습에 나서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10만이 넘는 엄청난 인파로 대혼란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혼란을 대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했던 자들이, 자신은 할 일을 다했으니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상대적으로 힘없는 이들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려는 몰염치, 몰상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또한 그 혼잡 속에서 살고자 몸부림하며 밀고 당기던 몸짓을 사고 유발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수사하여 색출하겠다고 엄포를 놓는가 하면, 모든 것은 그런 곳에 간 자들의 잘못이니 스스로 책임질 일이라고 인식하고 비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무지하고도 비정한 태도에 개탄을 금할 길이 없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다.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였던가? 치안이 가장 좋은 나라, 가장 안전하다고 세계가 인정하고 우리 역시 그렇게 믿고 누려왔던 나라 대한민국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고 나니 후진국이 되어있는 것인가? 국가는 어디 가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린 것인가?
2023년도 대한민국 정부 예산안을 보면, 국가의 부재와 각자도생의 현실이 더욱 확고해지는 듯하여 마치 공포 영화라도 보는 듯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민생예산은 사라지고 부자들을 더 부자 되게 하는 예산 일색이라고 한다. 노인 일자리, 공공 일자리, 아동 및 청소년 예산, 저소득 서민을 위한 예산 등이 무자비하리만큼 대폭 삭감되고, 장애인 및 장애여성을 위한 예산 삭감 또한 예외 없이 감행되어 사회안전망이 전반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수준으로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장애여성지원 예산을 살펴보자.
2023년 예산안에 따르면, 여성장애인 지원 예산을 2022년 대비 무려 9.1% 삭감하여 내년도 총예산이 불과 25억 1천3백만 원으로 책정되었다. 여기서 겨우 17억 3천1백만 원이 교육지원사업 예산이다.
현재, 전국 17개 시도 43개 기관에서 여성장애인 교육지원사업을 운영 중에 있는데, 지역사회의 여성장애인을 대상으로 역량강화 교육, 상담 및 사례 관리, 자조 모임, 지역사회 연계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여성장애인 역량강화 교육사업은, 비장애인은 물론 전체 장애인구 대비 교육수준이 현저히 낮은 장애여성들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상담 및 자조모임 활동 역시 장애여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활동 영역이 제한되는 중증 장애인들에게는, 교육의 목적 외에도 외부 활동의 동기를 제공함으로써 신체적 정서적 건강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바다.
그러나 이 중대한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들은, 예산 부족으로 인건비와 사업비 조달에 늘 허덕이는 실정이다. 이에 내년도 예산 삭감이라는 소식은, 기관들에 대한 사형선고라고 할 만큼 가혹하기 짝이 없다.
장애여성 출산지원금은 또 어떠한가? 국가 정책으로 출산장려정책을 지향한다고 하면서, 여성장애인의 출산지원금은 전년도 대비 18.8 % 삭감하여 불과 7억 7천9백만 원에 그치고 있다. 이 정부는, 장애인의 모성권은 보장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장애인의 출산 및 육아지원정책은 없는 것인가? 장애인에 대한 정부 정책은 도대체 무엇인가? 너희들도 각자도생하라는 것만이 정부의 정책인가?
사회적 약자나 서민을 돌보지 않는 것은 국가적 폭력이다. 복지 선진국으로 그 보폭을 빠르게 넓혀가던 대한민국에 복지는 어디로 사라지고 사회안전망은 어떻게 무너져내리고 각자도생이라는 이름의 국가적 폭력만이, 장애인과 모든 사회적 약자들을 위협하는 흉기가 되어 번뜩이는 것인가?
사회안전망이란 과연 무엇인가? 단지 저소득 노인, 아동청소년, 장애인 등 소위 말하는 사회적 약자들만의 보호망일까? 이 보호망 없이 고위 관리직이나 부유층 인구들이 지금 누리는 부귀와 안녕을 여전히 누릴 수 있을까?
지난여름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물난리의 현장 그 충격을 기억할 것이다. 지하방으로 넘쳐들어온 수마에 갇혀 죽음을 당하고, 도로 곳곳에 수많은 자동차들이 물에 잠긴 채 멈춰 섰고, 무심코 길을 가던 사람이 뚜껑 열린 맨홀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끔찍한 사건들..
서울시가 서울 시내 하수처리 관련 예산을 전년 대비 20퍼센트 이상 대폭 삭감한 것이 참사의 주된 원인이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예산 삭감으로 인해 환경미화원 등 시설관리 인력들을 대폭 감원하여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짐으로써 도로 가의 빗물받이 등 하수처리시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따라서 곳곳에 쓰레기들로 막혀 빠지지 못한 빗물이 수마가 되어 온 도시를 할퀴어,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과 재산을 잃고 생명을 잃는 충격적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렇게 무리한 예산 삭감으로 인해 벌어진 후진국형 대형 참사를 올 들어 벌써 두 차례나 겪은 실정임에도, 서울시는, 내년도 서울시 안전 예산을 9백억 감축하고, 안전 담당 공무원 수를 대폭 축소하는가 하면, 정부는, 공공 일자리 6만 개를 날리고, 장애인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특히 장애여성을 위한 예산은 그 수치를 입에 올리기도 민망할 만큼 이미 너무나 미미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9퍼센트 이상을 삭감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이렇듯 사회안전망의 기초를 흔들 때 우리는, 크고 작은 재앙이나 국가적 재난을 끊임없이 직면하게 될 것이다.
모든 건축물의 상부는, 하부 구조의 탄탄한 지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 사회 구조의 최상부에서 최고의 권력과 풍요를 누리고 있는 자들은, 이 구조물의 중간 혹은 하부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근로자들과 저소득 가정의 노동자, 청소년, 노인들뿐만 아니라 장애인들까지도, 구조망의 각 부분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지금의 그 부귀와 안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구조물의 밑돌을 여기저기 뽑아서 상부 조직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해 한다면, 구조물은 결국 붕괴되고 모두 자멸하는 대형 참사를 면치 못할 것이다.
장애인도, 저소득 근로자도, 노인도, 재벌도, 고위 관리직 공무원이나 정치 지도자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부분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해나갈 때 국가라는 거대한 구조물이 탄탄하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