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보내며
- 유영희(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
창밖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은 눈이라도 뿌릴 듯 흐려 있다. 빼곡히 일정이 표시된 책상달력은 더 이상 넘길 뒷장이 없다. 드문드문 잡히는 1월의 일정을 위해 2017년 달력이 등장한지는 한 달 전인가 보다. 흘러버린 시간의 속도에 흠칫 놀란다.
2017년 2월 3일 후에는 상임대표로서의 일정을 기록할 일은 없다. 지난 하루하루의 일정들의 기록을 꺼내서 읽어봤다. 참 많이도 바쁜 나날이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날은 눈물이고 어느 날은 웃음이며 어느 날은 분노가 뒤엉켜져 있다.
스스로를 향해 잘했다는 칭찬보다 부족했다는 질책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허점투성이의 역량으로 출발했으니, 길을 함께 걷는 이들이 참 힘들었으리란 생각도 가져본다.
류머티즘이란 질병을 만나 35년이라는 투병의 역사가 오늘을 있게 했다. 12번의 수술을 거쳐 현재를 밟기까지 설움의 날은 길고도 깊다. 나를 향해 아무도 사람구실하며 살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혈연관계로 묶인 이들마저 사람이 못쓰게 됐다고 말했었다. 잉여인간으로 살지도 모르는 미래는 죽음보다 참담했다.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한다. 지금을 사는 게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그 힘듦이 영원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사람구실 못할 거라고 말하는 이들은 물론 나 자신조차, 이리도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며 여성장애 인권운동 현장의 복판에 서게 될 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3년의 소임이 저물어가고 있다. 이 너머에는 어떤 일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시간에 여유롭고 한가한 삶을 누리고 싶다. 목 터지게 외쳐도 변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절망의 시간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현장을 지키며 여성장애인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절규하는 동지들에게 박수를 보낼 것은 분명하다.
한 해를 보내며, 아니 임기를 마감하며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더딜지라도 정녕 이루어지는 날이 있으니 주저앉지 말라고……. 1센티의 변화가 모이고 모이면 지구를 돌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한국여장연호는 수직과 수평의 조화에 의해 항해를 계속한다. 수평이나 수직의 조화가 깨지면 배는 침몰한다. 그러기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 네가 있어야 내가 존재하며, 네가 행복해야 내가 웃는 조직이 한국여장연이다. 단 한사람의 영웅에 의해 배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 모두의 힘과 마음이 모여 한국여장연호는 오늘도 전진한다.
조금은 순탄한 항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못다 한 사랑과 못다 한 숙제들에 용서를 구하며 한 해와 임기의 남은 날을 보낸다.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