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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장연 웹진

75호

75호
<우리가 사는 이야기 2> 쑤컁이의 에필로그

<우리가 사는 이야기 2>

 

쑤컁이의 에필로그

 


 

경남여성장애인연대

안숙향 회원

 

 

코로나 시국 속에 여러 회원님들 무탈하신지요?

중증뇌성마비라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또 하나의 나와 50년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고 있는 안숙향입니다.

 

경남여장연의 사무국장님께 글 하나 써 줄 수 있겠냐는 제의를 받고 잠시 망설임 끝에 승낙했습니다. 글을 쓰려고 보니 머릿속만 복잡하고 별로 쓸 만한 내용도 없는데... 컴퓨터 앞에 앉긴 했으나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어 한참 동안 멍하니 하얀 빈 파일만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자니 눈이 아파 옵니다. 횡설수설이나 되지 말아야 할 텐데라는 바람으로 저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합니다.

 

저는 경남 함안군 군북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5남매 중 늦둥이 막내딸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태어난지 백일 전후에 심한 열 경기로 인해 뇌성마비가 발병되었고 그로인해 중증의 장애를 얻고야 말았답니다. 장애로 인해 39년 동안 바깥 구경 한번 제대로 못하고 집안에서만 늘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는 곳이 시골인데다 부모님도 연세가 많으셨고,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옛날이라 장애에 대한 이해나 인식조차 무지했습니다. 저와 같은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가 다닐만한 학교는 없었을 뿐더러 부모님 역시 사지육신도 못 쓰는 저거 가르쳐 봤자 오데 써 먹겠나!” 싶은 생각이셨습니다. 동네 친구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인성이나 사회성을 키워가며 성장해 나갔지만 저는 입학통지서가 나왔음에도 학교 문 앞도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전 학창시절 추억이나 동창생이 없습니다. 가끔 지인들 모임에서 학창시절, 동창생들 이야기가 나올 때면 저는 그 속에 끼어들 틈이 없답니다. 그렇다 보니 제 마음 한 켠에는 학창시절의 추억이나 동창생에 대한 동경심이 막연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지금 이렇게 한글이라도 깨우칠 수 있게 된 건 저희 작은언니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나이 9살 되던 해, 작은언니는 비록 학교는 보내지 못하지만 까막눈은 면하게 해줘야 되지 않겠나...’ 란 마음에서 제게 한글의 자음, 모음을 하나하나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글을 다 떼기도 전에 언니가 결혼을 하게 되어 저의 한글 배우기는 아쉽게도 그만 멈춰 버리고 말았답니다. 이후 혼자서 떠듬떠듬 동화책을 읽으면서 한글은 다 떼게 되었습니다.

11살에 아버지께서 간암으로 소천하시고, 가세가 기울어짐에 따라 엄마 혼자 몸으로 집안팎 일들을 다 돌봐야 했으니 막내딸까지 돌볼 여력도 없었답니다. 늦은 밤시간 이외엔 전 항상 혼자 지내며 밥도 챙겨 먹고, 방 청소도 하고. 책과 라디오를 벗 삼으며 그렇게 세월을 보냈답니다. 39년이란 시간을 부모님 보살핌 안에서 살았다 하면 흔히들 그럼, 완전 온실 속에 화초로 자랐겠네!” 라는 말을 하곤 한답니다. 물론 9살 반까지는 온실 속 화초가 맞았지만,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는 온실 속 잡초로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우연찮게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답니다. 제게 있어선 단순히 고맙다. 란 표현으로는 너무 부족한 친구랍니다. 그 친구를 통해 바깥세상도 알게 되고, 38살이란 나이에 검정고시에 도전도 하게 되어 고졸 자격증까지 땄습니다. 대학 학과장님과 면접을 봐서 합격 통지를 받고 입학 예치금도 내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는 기쁨의 맛도 보았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어떻게 해서든 대학진학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미련도 있었지만 300만원 이라는 입학금도 문제였거니와 그보다 도저히 대학 공부를 해낼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 제일 큰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39세란 많이 늦은 나이에 엄마 품을 박차고 나와 자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일이 다 열거는 못하지만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감사한 친구분들이 많습니다. 경남여장연과 인연이 되어 여러 프로그램과 교육들에 참여하여 내가 몰랐던 것들에 관하여 많이 배우면서 알아가기도 하고,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삶의 주체가 되어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리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항상 인생이 내 마음같이 늘 행복하고 좋을 수만은 없다는 현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립을 결심하고 지금껏 지내오면서 자립을 한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20201월 말 즈음부터 시작된 코로나191년이 넘도록 물러날 낌새 초차 보이질 않고, 모두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슬픕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도 있으니 언젠가는 코로나와의 공존시대에서 벗어날 그날이 올 것이란 희망으로 우리 함께 건강하게 잘 버티고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처럼 마스크 없이 맘껏 숨 쉬고 서로 자유로이 얼굴 마주하며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파이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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