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Focus 1>
붓으로 걷는 자유
이은희
5시 긴장 탓인지 어느 날 부터 아침잠이 없어지더니 나의 기상시간은 늘 5시 밥을 짓고 초등생 딸아이 학교 갈 준비를 챙기고 씻고..
출근준비를 하는데 시간과 체력안배를 머릿속에서 계산해본다
밥상을 치우고 출근복으로 갈아입고 신발까지 신은 후 나는 다시 침대에 눕는다.
출근 30분전 마지막 출근 채비를 한다. 누워서 하는 초스피드 화장은
날 따라 올 자가 없다.
허리의 통증을 조금 완화하고자 함이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의 출근 준비로 출근 전 이미 하루 나의 에너지의 50퍼센트를 사용한 듯하다.
맥박이 빨라지고 허리 다리 통증이 만만찮다.
거친 숨이 조금 잦아들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출발해야할 시간
잠시 누워 한숨 돌렸으니 이제 나의 전쟁터로 돌격할 시간이다.
총칼대신 정신을 재정비 한다.
3시간 동안의 출근 준비다
나는 몇 해 전 까지 장애인들이 운영하는 카페의 매니저였다.
오늘은 또 얼마나 버라이어티 한 장면들이 연출이 될까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듯 전투대세로 직장생활을 했다.
커피도 모르는 카페 매니저라니!!
또한 발달 지적 장애인 직원들은 커피교육을 다 받고 왔다지만 어디 일이라는 것이 커피 만드는 교육 하나로 끝낸 후 일을 능숙하게 이어 나갈 수 있는 일이더냐.
충분한 훈련, 견습 기간 없이 모인 장애인들의 카페는 밖에서 보기에는 그럴듯했지만 실제상황은 전쟁터였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그릇을 닦고 걸레는 어찌 빨고 닦아야 하는지...
청소를 하고 기계를 관리하고 커피를 만들고 손님을 응대하는 방법까지~
어린아이 걸음마를 시작하듯 하나에서 백가지를 가르쳐야 했다
반복 또 반복만이 살길이다! 하며 어쩌든 절반의 성공은 한 듯싶었다.
점장과 바리스타 없이 몇 시간씩 직원들끼리 업무를 이어갈 정도로 자립이 되었으니!
삼년을 그리 보내고 나니 내 인생의 90살은 산 것 같았다.
업무강도가 이리 높은 줄 몰랐다.
비장애인이 들을라치면 뭐 그 정도가 그리 어렵냐고 의문을 제기 하겠지만 담당 공무원을 상대하랴, 직원 교육하랴, 몸소 뛰라, 매출,,,
매출을 올리라하니 과업달성을 위해 커피도 몰라 무지했던 나는 무식하게 뛰었다.
퇴근길 운전은 늘 눈물 바다였다.
내가 언제까지 이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이 업무는 내게 맞는지, 업무량은 적당한지..
발달장애인 직원들은 또.....카페 직원으로서 가능성이 있는 건지
휠체어를 타고 딸아이하나를 키우는 것도 힘들었는데 어린아이 다섯을 키워내는 것 같았다. 커피전문가, 컨설턴트도 없이 시쳇말로 무대뽀로 전진했다.
삼년 후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주위에서 이제는 요양원에서 쉬어야 하지 않냐는 눈치 없는 농으로 인사를 했다.
내 나이 마흔다섯 장애를 가진지 이십 이년이 지난해였다.
3년 후 퇴사하고 나는 늘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났다
나의 특별한 직장 체험기이다
스물세 살에 중도장애로 휠체어를 타게 된 이후 나는 대학에서 사회복지사 직업재활사전공후 여러 가지일들을 해왔다.
사회복지사, 자립생활센터 상담사로 여성장애인연합,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간사로 학교 방과 후 교사로 개인과외에서 학습지 공부방까지.... 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친구들처럼 돈을 벌고 직업을 갖고 싶었다.
결국 직장 장기전에 실패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근무 중 휠체어를 타고 시시때때로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심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정부는 장애인들의 취업 기회를 늘리기 위해 1991년부터 장애인 의무고용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 재활법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상시근로자 50명 이상의 공공기관과 민간 기업은 일정
비율의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이러한 규정을 잘 지켜지고 있을까?
물론 아니다. 이미 이러한 분석은 해마다 해오고 있지만 장애인 의무고용을 지켜야 할 공공기관이 오히려 의무고용 비율을 지키지 않아 고용부담금으로 납부액이 매년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차라리 벌금을 내겠다는 공공기관의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장애인은 또 다른 역차별을 받고 있다
장애인을 고용하면 업무가 잘 안될 것이라는 선입견 그리고 부담금이 기업이나 공공기관에 그리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장애 유형별, 개인특성별 직무분석과 직업체험과 취업 후 지속적인 관리 부재가 아닌가 싶다.
장애 발생 후 25년이 훌쩍 지난 현재.
나름 여러 가지 상황들을 고려해 내가 좋아하고 맞는 직업을 택해 이어 나가고 있다
사고 전 전공이었던 서예를 학교 방과 후 강사로 또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
시간당 3만원이라는 적은 강사비와 고정적이지 않은 수입이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이지만, 처음 붓을 들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가방을 들어주고 휠체어를 내려주려고 아이들은 일찌감치 주차장에 나와 날 기다렸다. 아이들에 내게 보여준 신뢰와 사랑이었다.
학교에서 받은 장애이해 교육으로 인해 나는 장애인이고 아이들은 비장애인이었지만, 나를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나의 장애가 궁금했던 것 빼고는 아이들에게 나는 장애인이 아닌 글씨 선생 이었다.
얼마나 좋은가 서로를 구분 짓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란!
나의 장애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작가라서 가능한 파트타임이 내게 적절한 일이 아닌가싶었다
척수장애인은 감기라던가 몸살이 나더라도 회복하는 시간이 비장애인보다 훨씬 더디다, 그만큼 더 주의를 요해야하고 휴식해야할 시간, 기간도 충분히 필요하다
그야말로 프리랜서작가로 내 상황에 따라 시간을 조절해 작업을 하고 강의를 하고 있다.
서예(캘리그라퍼)가라는 직업도 차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주 가끔은 장애인예술가라서 작품자체가 폄하 당한 경우도 있었다.
장애인작가라는 이유로 작업비도 싸게..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의뢰하는 단체의 특성에 따라 자의로 무료로 글씨를 써주거나 캘리그라피 퍼포먼스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재능기부라는 미화된 노동력의 착취에 살림은 여전히 궁색하기 마련이다
스물 몇 해 동안 오롯이 혼자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그렇게 다다른 직업 종착역에 너무 늦게 도달했다. 내 나이 마흔아홉이다
그 찬란했던 이십대 사십대 나의 청춘이 서슬 퍼렇다.
다양한 경험은 작가로서의 자양분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돌아 보면 나의 청춘이 아쉬울 때도 있지만, 분노와 아픔 울적함을 내려놓기 위해 붓을 든다
내 마음을 전한다.
때론 잔잔하고 때로는 격하다
먹 선이 주는 깊고 단순한 작업에 내 마음이 언젠가는 고요해 지리라..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대중 앞에서 쓴다 그리고 전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자신을 사랑해줄 순 없을까요?
캘리그라퍼 이은희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다.
사랑 그것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
묻고 싶다
그 일은....
여성장애인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일이었는가?
가사노동과 병행해야하는 상황을 이해하는가?
(척수장애와 신장이식까지 한) 내 장애의 강도에 맞는 일인가?
사후관리는 진행이 됐는가?
업무내용에 대한 전문가, 수퍼바이저가 있었는가?
여성장애인의 특수성을 염두 해 두고 평가하고 고민하고 개선해 나가지 않는다면 여성장애인은 일자리에서 조차 소외되어 여성과 장애라는
이중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생각 한다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함을 느끼며 살고 싶다.
장애인 최고의 복지는 취업을 보장하는 것이다
당당한 자립을 위해!